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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이야기
칼뱅은 교회의 자발적 시민사회 참여와 신자와 비신자와 참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형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칼뱅의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이 공동선에 어떠한 관점을 가졌는지에 대한 대립된 두 그룹이 존재한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한 신칼뱅주의는 일반은총 교리가 칼뱅에게 명백히 발견된다고 주장하며 일반은총 교리와 칼뱅을 가까이 두려고 한다. 이렇게 신칼뱅주의를 따르는 그룹은 공동선 사상에서 일반은총 교리를 독립적인 신학의 범주로 다룬다. 그러나 다른 그룹은 칼뱅과 일반은총과 연관성이 약하다고 보며 일반은총과 칼뱅을 멀리 떨어뜨려 칼뱅의 공동선 사상에서 일반은총의 중요성과 역할은 축소시키려 한다. 그렇다면 칼뱅의 공동선과 일반은총의 관계에서 어..
칼뱅은 타락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복원될 수 있다고 봤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 측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어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칼뱅은 이렇게 진술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진정한 변화를 가질 수 있으며 가장 완전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새로워진 삶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시작하게 만든다.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게 한다. 신자들은 한 아버지..
칼뱅에게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공동체적 형상은 윤리적 근거가 되며 서로를 위하여 사랑을 나누는 존재로서 인식케 하는 근본이었다. 타락은 칼뱅에게 공동선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칼뱅은 타락 후 상실한 하나님 형상을 실체로 보았다. 타락한 인간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짐으로 하나님 형상은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뿐이다”. 칼뱅의 이러한 시각은 그의 초기 저서와 후기 저서에 차이가 보인다. 초기 저작에서는 하나님 형상이 모두 지워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나 나중 그의 저작에서는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조금 남아 있는 듯 진술하고 있다. 칼뱅은 하나님의 성품이 없어 보이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선을 가장 투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칼뱅은 타락 이전의 인간을 탁월함과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로 간주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 형상이 상실되어 신적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인간에게 타락 이전 하나님 형상을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칼뱅의 공동선에서 하나님 형상 원형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내러티브를 통해서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넣으셨다. 칼뱅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인간 안에 주입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영광'. '온전해진 우리의 성품'이라 표현한다. '선한 일에 열심일 때 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춘 모습이었을 것이다'라는 칼뱅의 진술을 통해 ..
프로테스탄트 전통에서의 공동선은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트 공동선의 시작은 루터지만 공동선의 틀을 물려준 사람은 칼뱅이다. 칼뱅의 공동선에 대한 사상들은 공동선을 따로 다루지 않았다. 그의 공동선 사상은 그의 작품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분량과 내용도 깊다. 칼뱅의 저서 속에 나타난 공동선 사상을 살펴보자. 먼저 그의 공동선 사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형상이다. 하나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했는지가 칼뱅의 공동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하나님 형상을 실체적, 관계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분석한다. 먼저 하나님 형상의 실체적 차원을 살펴보고 칼뱅의 공동체 사상의 주된 바탕이 되는 신적 차원의 관계적 측면과 이와 긴..
정치철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도 공동선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왔다. 개인의 사익과 공적 유익 모두를 만족하며 사회 통합과 질서 유지까지 아우르는 공동선을 찾아왔다. 앞에서 살펴봤듯 자본주의가 되었든 공산주의가 되었든 어떠한 경제체제 안에서도 완전한 공동선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익을 위해 공익이 존재하고 공익을 위해 사익이 존재하는 공동선의 조화를 말하는 서양 고전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는 계몽주의 이래로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을 제외하고 영속적 가치가 제거되어 국가와 교회가 서로 분리되면서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이 배제된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을 살려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을 되살린다면 공동선의 위치는 달라진다..
근대에 들어서자 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나타난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정치생활의 변화와 부패라는 위협에 대비하려면 특정한 정치제도가 필요하다 보았다. 이 제도가 바로 공화정인데 권력이 인민에게 있으며 정치적 안정은 질서가 잘 잡혀 있을 때 달성된다. 시민들의 자유의 보장은 공동선을 우선하여 행동할 때 자유가 보장된다고 봤다. 그는 공화정이 공동선 증진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도 보장하는 체제라 여겼다. 공화국의 안전은 개인의 사익을 포기할 때 확보된다. 마키아벨리 이후 공동선이나 공익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등장한다. 마키아벨리와 함께 근대 정치사상의 시조라 불리는 홉스는 개인의 자기 보전을 우선시했다. 그에게 공동선은 개인의 자기 보전과 행복 추구 보장이다..
'공동선 (Common good)'의 정의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사전적 정의는 '모든 사람의 유익이나 이익 (the benefit or interest of all)' 또는 '모두의 선함 (the good of all)'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개념은 광범위한 함의와 다양한 맥락을 가진다. 공동선을 'common good'이라 표기한다. 공통 혹은 공동이라는 말에는 단순하면서도 자연적이고 평상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공동선은 "단순하면서도 자연적이고 평상적이면서도 쉽게 접근하여 얻을 수 있는 선"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이 본성에 따라 추구하는 선이라면 그 선은 인류 공통적인 것이며 모두가 함께 추구하면 그 선이 바로 공동선이다. 따라서 공동선은 개인과 집단 모두가 공통으로 바라는 것이며 인간이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