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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차원에서 나타난 공동선

발렌 2021. 12. 31. 07:49

정치철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도 공동선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왔다. 개인의 사익과 공적 유익 모두를 만족하며 사회 통합과 질서 유지까지 아우르는 공동선을 찾아왔다. 앞에서 살펴봤듯 자본주의가 되었든 공산주의가 되었든 어떠한 경제체제 안에서도 완전한 공동선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익을 위해 공익이 존재하고 공익을 위해 사익이 존재하는 공동선의 조화를 말하는 서양 고전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는 계몽주의 이래로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을 제외하고 영속적 가치가 제거되어 국가와 교회가 서로 분리되면서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이 배제된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을 살려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을 되살린다면 공동선의 위치는 달라진다.

신학적 차원에서 공동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 최고선이신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 기독교는 공동선으로 가는 최선의 길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본다. 계몽주의 이후 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근본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그 어떤 사회도 자유는 평등을 희생시키고 평등은 자유를 제한하는 모순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순종할 때에 자유와 평등 모두가 가능하다고 본다. 구약성경은 신법에 기초한 도덕법을 제공했으며 하나님이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보전과 안전과 번영을 책임지셨으며 영적 사회적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시는 역사를 보여주셨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공동선을 전 세계에 확장시키는 출발점으로 여긴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공동선을 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공동선을 찾을 때 아퀴나스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아퀴나스는 가톨릭 공동선 사상의 기원이자 종합이라 할 수 있고 공동선 사상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한 개인의 선함보다 한 민족이나 도시를 위한 선이 더 귀하다 봤다 . 아퀴나스는 모두가 바라는 공동선은 각 개인의 선을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 공통적인 가장 높은 선함을 하나님 스스로의 자아와 동일시함으로 공동선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가치로 여겼다. 아퀴나스는 "모든 것의 선함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기에 최고의 하나님 자신이 바로 공동선이시다"라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성품에 대한 근원적 선포라 말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이성을 가진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고 각 구성원이 선을 지향할 때 공동선이 이루어진다고 봤다. 인간의 이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으며 이 이성을 사용하는 국가를 통해 자연적 목적을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국가의 통치력은 개인의 활동을 공동선으로 이끌 수 있다. 국가는 “인간 본성의 합리적 산물“ 로 국가는 특유의 영역을 가진다. 자연법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공동선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국가는 공동선과 개인의 선을 조화롭게 협력시키며 시민의 공동선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

아퀴나스 이후 중세 가톨릭에서 퇴보하던 공동선을 다시 복구시킨 인물로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를 들 수 있다. 이냐시오는 종교개혁에 맞서 예수회를 설립하여 공동선의 지상적 실재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종교적 사역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과 사회봉사에도 힘썼다. 공동선의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퀴나스와 이냐시오로 이어져온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