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인문주의자였던 칼뱅
16세기 프랑스는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인문주의 운동이 활발했다. 칼뱅은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했다. 당시 종교개혁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인문주의적 정신적 태도들을 공유했으며 개혁자들은 인문주의자이거나 인문주의의 교육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칼뱅은 프랑스 인문주의 문화의 중심부에서 성장했으며 교육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의 영향 아래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일었던 프랑스 르네상스의 황금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칼뱅의 신학사상의 모태가 된다.
칼뱅의 청년 시절은 프랑스의 수많은 인문주의자들과의 만남의 연속이었다. 그가 뛰어난 신학적 체계의 역동성과 실천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시대정신인 인문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분명해진다. 칼뱅은 당시 인문주의의 전성기에 파리, 몽떼귀 등의 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뛰어난 인문주의자이며 뛰어난 학자일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인문주의자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르네상스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관심에 귀 기울였다. 칼뱅의 신학사상은 당시 인문주의적 영향 속에 살고 있는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대중들의 삶 속에서의 발생하는 신앙적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인문주의의 수사학적 언어를 사용한 성서적 답변을 하였다.
16세기 전반의 종교개혁 시대는 앞선 르네상스 시대의 지적, 사회적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당시는 세속화를 경험한 현대와는 다르게 종교와 정치, 교회와 사회, 신학과 타 학문 간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종교와 문화가 통합되어 있는 시대였다. 14-16세기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근대 이후 인간주의와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들은 근대 이후 인간주의와는 다르게 종교적이었으며 교회의 붕괴보다 교회의 갱신과 회복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칼뱅신학이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은 지금껏 칼뱅주의 신학담론에서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반성이고 그동안 간과했던 칼뱅신학을 형성했던 그 시대의 정신문화적 맥락을 연구하는 것이다.
칼뱅의 신학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저술의 체계와 언어적 특성은 인문주의와의 관련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가 교육을 받았던 16세기 초 문화는 인문주의 학문이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사상의 독특성이 신학과 타 학문 간의 밀접한 연관성으로 말미암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인문주의는 그의 사상적 배경 이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어떤 사상이나 의식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생각을 변화시키는 교육적 영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 시대의 언어와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한다. 16세기 초 프랑스의 인문주의는 일반교육과 문화의 영역뿐만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 조차도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칼뱅은 주류에서 교육받았으며 칼뱅 스스로도 인문주의자라 불려지기를 원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칼뱅의 신학 형성 과정이 인문주의와의 상관성을 가지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