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생애 2
1529년 칼뱅은 부르쥬(Bourges)대학으로 옮겨 갔다. 칼뱅이 이곳으로 옮긴 이유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알카아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칼뱅의 생애에서 법학 수업은 중요한 전환점을 가지게 된다. 만약 그가 파리 대학에서 계속해서 신학을 공부했더라면 보수적인 교육을 받아 로마 성직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오를레앙에서 로마법과 고전어학을 위시하여 인문주의 학문을 접했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과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할 학문적 기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1531년에 보다 심도 있는 어학 공부를 위해 파리의 성경적 믿음과 인문주의적 학습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 파리의 왕립강좌의 수강생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칼뱅은 볼마르 교수에게 그리스어를 배워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칼뱅은 파리에서 새롭게 꼽 가문과 만났으며 개혁에 찬성하는 부유한 상인인 들 라 엔띠엔느 포르쥬과 교제하였다.
칼뱅은 1532년 그의 처녀작인 세네카의 『관용론』을 자비로 출판한다. 『관용론』은 칼뱅이 젊은 날 수련한 인문주의 학문이 집대성되어 있으며 에라스무스와 로렌쪼 발라, 뷔데의 방법론을 충실히 구사했다. 뿐만 아니라 칼뱅의 개성과 독창성도 잘 드러난 작품이며 에라스무스의 동일한 주석을 능가하려 했다. 여기서 22명의 그리스 저자들과 56명의 라틴저자들을 인용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7명의 교부들과 뷔데와 에라스뮈스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인문주의 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때 그 자신도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소개하고 있다. 칼뱅에게 있어서 복음주의와 인문주의가 함께 공존한다. 『관용론』을 칼뱅의 습작 정도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칼뱅은 많은 성서주석을 집필하였다. 『기독교 강요』 역시 성서 주석들을 체계화시킨 것이기에 칼뱅의 저작 활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칼뱅의 『관용론』은 그의 많은 주석 작업의 시작이며 그 후의 작업의 모형인 것이다.
칼뱅의 데뷔 작품은 그를 인문주의 학자로서 인정받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학업에 매진하던 1520-1530년대의 프랑스 인문주의 상황에서 고전의 주석을 저술한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학업의 마지막에 이 책을 출간한 것은 법률가보다는 인문주의 학자 혹은 문필가로서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에 대한 의의는 칼뱅이 인문주의 학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줬고 자신의 진로를 성직자나 법류가가 아닌 인문주의 작가가 되기로 자신의 길을 정한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네카 주석을 통해 칼뱅의 인문주의 교육은 그의 작품에 깊이 녹아 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